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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하여

  • 작성자 사진: 온리트건축사사무소
    온리트건축사사무소
  • 2024년 2월 24일
  • 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4년 2월 27일

한동안 즐겨보던 드라마가 있었는데요. '도시남녀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입니다. 남자 주인공이 건축가로 나옵니다. 실제 건축 업계에 몸담고 있는 실정이라 드라마에 '건축가'라는 직업이 등장하면 일단 판타지 소설 읽듯이 보게 됩니다. 근데 이 드라마는 꽤나 현실적으로 '건축가'라는 직업을 표현했습니다. (그래도 32살 팀장님이 독실을 차지한 설정은 판타지 소설 같았습니다.) 드라마를 보다 보니 일순 뇌리를 스치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야 너 서울에 100년 넘은 건물이 몇 채나 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냐? 다들 2,30년도 못 가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사라져. 이왕 온갖 자재들 다 모아서 세상에 점 하나 찍을 거면 만든 사람이 후회 없게, 사는 사람이 대를 이어서 살 수 있게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그래."


이미 중간 설계까지 마친 단독주택의 평면을 바꿔버리겠다고 공언한 남자 주인공이 함께 일하는 부하직원이자 사촌 동생을 설득하기 위해 한 대사입니다. 저 대사를 듣는 순간 제주도에서 봤던 오래된 구옥 한 채가 떠올랐습니다. 그 구옥은 남편의 외갓집이었는데요.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그 집에 직접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정성스러운 손길이 닿았던 흔적이 남아있는 앞마당과 빨간 벽돌, 크고 두꺼운 장식 돌로 만들어진 낮은 난간, 나뭇결이 살아 있는 내부 인테리어 등 그 집에 대한 저의 첫인상은 '귀하다'였습니다. 이 집에 살았던 분들이 귀하게 여긴 티가 공간 이곳저곳에 묻어있었고, 남편의 오래된 기억이 살아있는 집이기에 귀했고, 요즘은 찾기 힘든 아름다운 구옥이기에 귀했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집은 몇 장의 서류들로 정리를 마치고 허물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신축 건물이 뚝딱 들어섰죠. 그 땅에서 빼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용적률이 적용된 듯 보인 신축 건물이었습니다. 남편도 저도 그 건물을 보고 나서 참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과연 우리가 건축사로서 어떤 사명감을 갖고 일을 해나가야 할 것 인지에 대해.


처음 건축사사무소를 개업하자고 마음먹었던 날부터 오랜 시간 이름에 대해 고민했었죠. 어떤 이름의 회사가 좋을까. 부르기 쉽고 잘 기억될 수 있는 이름이 좋을까. 오랫동안 쓰임 있는 건물을 많이 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영원하다'라는 뜻의 ETERNO라는 단어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귀했던 제주 구옥의 부재를 보며 건축사로서 감히 영원을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며 과유불급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영원을 바라기 보다 현재의 조건과 기대를 바탕으로 과거의 기억을 미래까지 이어지게 만드는 가변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원의 순방향인 ETERNO를 역방향으로 뒤집어 ONRETE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죠.


어느덧 회사에 온리트라는 이름을 명명한지 3개월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직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는 없지만 막후에는 이런저런 작업들을 진행 중입니다. 온갖 자재들을 모아서 찍게 될 첫 점이 저 또한 궁금해집니다. 회사의 이름을 지을 때처럼 욕심은 버리고 현재에 중용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세상에 점 하나 찍게 될 날이 오겠죠. 그때까지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며 천천히 기다릴 요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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